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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 ‘정책적 우클릭’ 넘어 ‘정체성 급변침’ 추진…“민주당, 원래 중도보수”
심상정도 조국도 없어 ‘집토끼’ 이탈 가능성 희박…과감히 ‘산토끼’ 공략
중도층은 계엄 반대-탄핵 찬성 여론 높아…與의 딜레마 “尹과 결별해야”

“우리는 원래 진보 정당이 아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2월19일 국회에서 기자들과 만나 이같이 밝혔다. 그는 “진보는 정의당·민주노동당 이런 쪽이 맡고 있다”며 민주당의 위치를 ‘중도보수’라 규정했다. 그는 전날(18일) 친(親)민주당 성향 유튜브 채널 ‘새날’과의 인터뷰에서도 “우리는 우클릭을 안 했다. 원래 자리에 있다”며 “우리는 중도보수 정도의 포지션이고, 진보진영은 새롭게 구축돼야 한다”고 했다.

민주당은 ‘원래 보수’였던 것일까. 이 대표의 일성 후 정치권에 때아닌 ‘이념 논쟁’이 촉발된 모습이다. 왼쪽을 대표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민주당의 정체성이 본디 오른쪽에 가까웠다는 이 대표의 주장에 여권뿐 아니라 야권에서도 당혹감이 감지된다. 이 대표는 DJ(김대중) 정부 때부터 민주당의 정체성은 중도보수였다고 강변한다. 그러나 정치권에선 조기 대선 캐스팅보터인 중도층을 겨냥한 ‘전략적 급변침’이라는 분석에 힘이 실린다. ‘윤석열 단일대오’에 반대하는 보수층을 포섭하려는 시도라는 시각인데, 그 효과를 두고는 정치권 내 상반된 진단이 나온다.

ⓒ시사저널 박은숙·사진공동취재단
ⓒ시사저널 박은숙·사진공동취재단

與 고민, 중도 10명 중 7명 “尹 탄핵 찬성”

정치 전문가들은 보수와 진보의 ‘콘크리트 지지층’을 30% 내외로 본다. 이들은 여야가 극렬히 대립하는 상황일수록 더 빠르게, 더 강하게 결집하는 경향을 보인다. 실제 12·3 비상계엄 후 탄핵 정국에 이르러서도 여야 지지율은 백중세를 이루고 있다. 엠브레인퍼블릭·케이스탯리서치·코리아리서치·한국리서치가 2월17일부터 19일까지 사흘간 전국 만 18세 이상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한 2월 3주 차 전국지표조사(NBS) 결과, 정당 지지율은 국민의힘 37%, 민주당 34%로 오차범위 내 접전 양상을 보였다.(NBS조사는 휴대전화 가상번호(100%)를 이용한 전화면접으로 이뤄졌고,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3.1%포인트)

결국 왼쪽과 오른쪽 사이, 30% 내외의 무당층과 중도층의 표심을 어느 정당이, 어느 후보가 더 확보하느냐에 따라 선거 당락이 갈리는 셈이다. 실제 접전이 벌어진 선거마다 ‘중원 전쟁’에서 승리한 후보가 대권을 쥐었다. 2002년 대선 당시 ‘언더독’으로 분류됐던 노무현 후보(새천년민주당)는 선거 막판 중도보수 성향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에 성공하며 이회창 후보(한나라당)를 간발의 차로 꺾고 대권을 쥐었다. 2012년 대선에선 ‘경제민주화’를 내세운 박근혜 후보(새누리당)가 문재인 후보(민주통합당)를 꺾었고, 지난 대선에선 김한길 전 민주당 대표를 영입하고 안철수 후보와의 연대를 발표한 윤석열 후보가 당선됐다. 반면 같은 진보진영의 심상정 후보(정의당)와 연대를 시도하다 무산된 이재명 후보는 0.73%포인트 차이로 고배를 마셨다.

윤 대통령 ‘탄핵열차’가 종착지를 향해 가는 지금, 정치권이 중도층 민심을 주의 깊게 살펴보기 시작한 것도 이 때문이다. 만약 다가오는 봄, 조기 대선이 펼쳐진다면 중도층이 캐스팅보터가 될 것이란 전망이 나오면서다. 우선 최근까지 드러난 중도층 민심은 분명 여권에 불리하다. ‘부정선거’ 가능성 등을 거론하며 12·3 비상계엄을 단행한 윤 대통령과 헌법재판소의 편향성을 비판한 윤 대통령 변호인단 태도에 반감을 드러내는 중도층이 적지 않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발표됐다.

2월 3주 차 NBS 조사에서 중도층에 ‘윤 대통령 탄핵심판 대응’을 물은 결과, ‘부정평가’가 67%로, ‘긍정평가’(27%)를 2배 이상 웃돌았다. ‘헌법재판소 탄핵심판 과정 신뢰도’ 조사에서 ‘신뢰함’이라고 답한 응답자가 65%로, ‘신뢰하지 않는다’(32%)고 답한 응답률을 크게 상회했다.

윤 대통령, 여당은 중도층에서 신뢰도를 상당 부분 잃은 것으로 나타났다. 중도층에 ‘윤석열 대통령 탄핵 의견’을 물은 결과 ‘파면해야 한다’는 응답이 67%로 ‘기각해야 한다’(27%)는 의견을 압도했다. 또 ‘대선 구도 인식’ 조사에서는 차기 대통령선거에서 ‘정권 교체를 위해 야권 후보가 당선되어야 한다’고 응답한 중도층 비율이 55%로 ‘정권 재창출을 위해 여권 후보가 당선되어야 한다’(29%)는 응답을 크게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비호감도’ 잡는 대신 ‘중원 공략’ 나선 李

최근까지 드러난 추세대로라면 민주당은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 셈이다. 중도층 내 ‘반(反)계엄·반윤석열’ 민심이 상당한 상황이라면, 민주당은 반사이익을 기대할 수 있다. 이미 유력 대권주자인 이재명 대표를 보유한 상황에서 굳이 ‘판’을 흔들 이유가 없는 셈이다.

그러나 이 ‘판’을 이재명 대표가 직접 나서서 크게 흔드는 모양새다. 이 대표는 실용주의를 앞세워 그간 민주당의 기조와는 다소 다른 정책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이 대표가 ‘우회전’과 ‘좌회전’을 번갈아 하는 듯한 모습으로 논란을 부르고 있다는 점이다. 일례로 이 대표는 반도체 연구개발(R&D) 분야에 ‘주 52시간제 예외’를 두는 방안을 수용하는 듯했다. 그러나 노동계의 반발이 일자 최근 들어선 근로시간 특례 조항을 뺀 채 반도체법을 처리하는 쪽으로 최종 방침을 정했다. 추가경정예산안(추경) 쟁점인 민생회복지원금을 두고도 이 대표는 “필요하다면 특정 항목을 고집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민주당은 사흘 후 발표한 추경안에 1인당 25만~35만원 ‘민생회복 소비쿠폰’ 예산을 포함시켰다.

친명(親이재명)계는 이를 윤 대통령과 대비되는 이 대표의 ‘유연한 리더십’이라 해석한다. 이념을 기준으로 경제·외교 정책의 가이드라인을 정하고, 야당과의 협상을 거부했던 윤 대통령과 구분되는 이 대표의 ‘강점’을 보여주는 사례라는 것이다. 수도권 지역구의 한 친명계 의원은 “윤 대통령이 왜 비상계엄을 했을까. 결국 ‘내 판단이 무조건 옳고, 절대 바꾸지 않겠다’는 독선과 오만의 결과”라며 “혹자는 이 대표가 ‘오락가락’하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고 하지만, 크게 흔들리는 경제와 정치 상황에 맞게 유연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는 게 정확한 평가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정치권 일각에선 이 대표가 ‘우회전’을 넘어 ‘중앙선 침범’을 하고 있다는 우려 섞인 비판도 제기된다. 이 대표가 실용주의를 넘어 당의 정체성을 ‘중도보수’라고 천명하면서다. 당장 보수 원류를 자부하는 국민의힘에선 “보수 정책 베끼기는 영혼 없는 ‘C급 짝퉁’”(권성동 원내대표), “민노총 극렬 세력의 눈치 살피기에만 급급한데 어느 국민이 믿겠나”(권영세 비상대책위원장) 등의 거친 비난이 쏟아졌다. 나아가 야권 내부에서도 “당의 정체성과 노선 변경은 당대표가 일방적인 선언을 했다고 되는 게 아니라 충분한 토론을 통해 국민의 공감대를 얻어야 한다”(김부겸 전 국무총리), “당헌과 강령을 두 번, 세 번 읽어봐도 어느 내용을 ‘보수’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이인영 민주당 의원)는 성토가 이어졌다.

비명(非이재명)계 전직 의원을 주축으로 한 모임인 ‘초일회’도 입장문을 내고 “당대표가 당내의 민주적 토론과 숙의 과정도 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민주당을 중도보수 정당이라고 말했다는 게 참 놀랍다”며 “중도층을 확보하겠다고 중도보수를 이념으로 바꾸겠다는 것은 어떤 토론도 없이 정체성을 바꾸는 당의 비민주성과 사당화 현상을 보여주는 것이고 정당의 전통과 역사, 규범을 무시하는 몰역사성을 뜻한다”고 꼬집었다.

이 대표 측은 ‘오해’라고 항변한다. 과거 DJ 시절부터 민주당의 노선은 ‘중도보수’였다는 주장이다. 실제 DJ는 1997년 11월13일 금융실명제 관련 방송 3사 공동주최 토론회 당시 ‘진보적 경제관이 후퇴한 것 아니냐’는 질문에 “우리 당은 중도·우파 정당이다. 자유시장경제를 지지하기 때문에 우파이고, 서민의 이익을 대변하기 때문에 중도”라며 “세계 모든 진보 정당들이 이제는 중도를 표방하고 있다. 내가 우경화했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정치권 일각에는 이 대표의 이 같은 변화가 ‘초조함’에서 비롯된 게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자신을 둘러싼 ‘사법 리스크’ 우려가 가중되는 가운데, 중도층에서 이 대표를 비토하는 민심이 적지 않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발표됐기 때문이다. 2월 3주 차 NBS 조사에서 중도층에 ‘이재명 대선후보 호감도’를 물은 결과 ‘호감이 가지 않는다’(60%)고 답한 응답자가 ‘호감이 간다’(36%)고 말한 응답자를 크게 상회했다. 정권 교체를 원하면서도, ‘대통령 이재명’에는 고개를 젓는 중도층이 적지 않은 셈이다.

한편에선 지난 대선과 비교해 달라진 ‘정치 지형’이 ‘이재명의 보수화’를 가능케 했다는 추측도 나온다. 지난 대선 당시에는 심상정 후보의 등판으로, 이 대표가 진보진영의 ‘몰표’를 기대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정의당의 세가 대폭 축소된 지금, 조기 대선이 펼쳐진다면 이 대표를 위협할 만한 ‘중량급 후보’가 진보진영 내에선 보이지 않는다. 그의 대항마로 여겨졌던 조국 전 조국혁신당 대표는 자녀 입시 비리 등 혐의로 징역형을 확정받고 서울구치소에 수감됐다. ‘집토끼’가 이탈할 가능성이 낮아진 만큼 이 대표가 ‘산토끼 사냥’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된 셈이다.

2월15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 일대에서 열린 윤석열 대통령 탄핵 촉구 집회에 참가한 시민들이 대통령 파면을 촉구하고 있다. ⓒ시사저널 임준선
2월15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 일대에서 열린 윤석열 대통령 탄핵 촉구 집회에 참가한 시민들이 대통령 파면을 촉구하고 있다. ⓒ시사저널 임준선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가 이끄는 대한민국바로세우기운동본부(대국본)는 2월15일 광화문광장 일대에서 ‘윤석열 대통령 탄핵 반대 국민대회’를 개최했다. ⓒ시사저널 임준선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가 이끄는 대한민국바로세우기운동본부(대국본)는 2월15일 광화문광장 일대에서 ‘윤석열 대통령 탄핵 반대 국민대회’를 개최했다. ⓒ시사저널 임준선

與 주류 “尹 재기”…“중도 놓친다” 우려도

민주당이 ‘중원 공략’에 공을 들이는 사이 국민의힘 지도부는 상반된 행보를 보이고 있다. ‘12·3 비상계엄’에는 사과했으나, ‘윤 대통령 탄핵 반대’ 당론은 굽히지 않고 있다. 최근 들어서는 헌법재판소 재판관들의 편향성, 나아가 탄핵심판 절차의 불공정성을 연일 저격하는 모습이다. 강승규 의원, 장동혁 의원 등은 강성 보수층이 주도하는 ‘윤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 연단에 올랐다. ‘박근혜 탄핵 정국’과 달리 보수 지지층의 결집세가 감지되는 가운데, ‘조기 대선 승리를 통한 정권 사수’라는 ‘플랜B’가 아닌 ‘윤 대통령 탄핵 기각으로 정권 사수’라는 ‘플랜A’에 ‘올인’하고 있는 셈이다.

여권 일부 인사는 ‘중도 눈치보기’를 ‘대통령에 대한 배신’이라고까지 규정했다. 이철우 경북지사는 2월19일 기자회견을 열고 “국민의힘이 조기 대선 운운할 상황이 아니다”고 주장했다. 그는 “대통령 탄핵심판이 계엄 행위에 대한 판단의 문제를 넘어 대한민국 수호 세력과 반국가세력의 충돌로 상징화되고 있는 마당에 국민의힘이 조기 대선이나 중도 확장을 운운하면서 눈치 볼 상황이 아니다”고 말했다. 이어 “반국가세력이 자당 대통령을 탄핵하려는 시도를 보고도 또다시 우물쭈물 눈치를 보다가는 국민의 신뢰를 잃고 정권도 잃어 훨씬 더 냉혹한 적폐청산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여권 일각에서는 국민의힘이 중도 민심에 반해 ‘윤석열 방탄’에만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는 비판도 나온다. 이 대표가 ‘중도보수’를 표방한 상황에서 여당이 좌회전은커녕 우회전만 계속하다가는 ‘중원 전쟁’에서 대패할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유승민 전 국민의힘 의원은 2월19일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 대표가 중도보수 영토까지 침범해 들어오는데, 국민의힘은 점점 더 오른쪽 끝으로 밀리고 있다. 진보부터 보수까지 0에서 10의 스펙트럼이 있다면 지금 국민의힘은 9~10 영역에 바글바글 몰려 있는 상황”이라고 비판했다.

진중권 광운대 특임교수는 2월18일 시사저널TV 출연해 “여당이 중도·강성 지지층 눈치를 동시에 보는데, 둘이 같을 수는 없다. 한쪽으로 입장이 분명해야 된다”고 강조했다. 이어 “윤 대통령이 ‘아웃(탄핵심판 인용)’되면 (조기 대선까지) 두 달밖에 안 남는다”며 “그때 가서 (국민의힘이 당 기조를) 급변침하려 하면 위험할 것”이라고 봤다. 2월17일 시사저널TV에 출연한 김경율 전 국민의힘 비대위원도 여당 지도부가 최근 지지율 상승세에 도취되어 있다며 “세상을 다 얻은 듯이 아스팔트로 나가는 것은 성급하다”고 경고했다. 

※ 기사에 인용한 여론조사의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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