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회담 이후 한미 간 MOU 11건 체결…‘마스가 프로젝트’도 본격 시동
한국 기업들, 209조원 ‘투자 보따리’ 푼다…투자 확대 요구·정책 리스크는 과제
한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미국에 모인 한미 주요 경제계 인사들이 ‘제조업 르네상스’의 서막을 열었다. 한미 협력의 새로운 장을 열기 위해 다양한 분야에 전방위적 투자를 결정한 것이다. 단기간에 수치화된 금액과 구체적인 내용이 담긴 한미 협력 방안이 가시화된 이후, 기업들도 본격적으로 대미 투자 보따리를 푸는 모습이다. HD현대와 삼성중공업이 조선업 재건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맺고, 한화는 필리조선소에 50억 달러를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밝히면서 한미 조선업 협력 프로젝트인 ‘마스가(MASGA·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도 본격적으로 닻을 올렸다. 양국의 동맹과 ‘빅딜’이 현실적인 경제 효과로 연결될 것으로 전망되는 가운데, 산업 주도권을 확보하고 대미 투자 가속화에 따른 리스크를 주의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투자로 한미 동맹 본격화…협력 내용은?
8월26일 미국 워싱턴DC에서 열린 한미 비즈니스 라운드테이블에서 한국 기업들은 1500억 달러(약 209조원) 규모의 대미 투자를 발표했다. 기존 관세 협상 타결 당시 발표됐던 3500억 달러의 금융투자 펀드와는 별개다. 양국은 미국 정부의 핵심 정책 과제인 조선업 분야에서 협력을 강화하겠다는 의지를 다시 확인하고, 반도체·AI·바이오 등 첨단산업, 조선·원전·방산 등 전략산업, 모빌리티·배터리·핵심소재 등 공급망 분야를 중심으로 논의를 이어갔다. ‘핵심 원천기술’을 가진 미국과 ‘제조 역량’을 가진 한국의 협력이 양국 안보를 넘어 국제사회 안정과도 직결된다는 데 의견을 같이한 것이다.
이날 경제 통상 분야에서 조선·원자력 등 11건의 기업 MOU가 체결됐다. 조선과 원자력 등 전략산업 분야에서는 양국 협력을 확대하기 위한 공동 펀드 조성·투자·기술 협력을 내용으로 하는 MOU가 6건 체결됐다. 항공·LNG 분야에서 우리 기업의 안정적인 사업 운영을 위한 계약 및 MOU 4건, 공급망 분야에서는 우리 기업의 핵심 희소금속 대미 수출을 위한 MOU가 체결됐다.
특히 관세 협상 타결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조선 분야 협력이 구체화되면서 조선업 협력 프로젝트인 ‘마스가’에 시동이 걸렸다. 한화는 한미 협력의 상징적인 장소가 된 필리조선소에 50억 달러를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필리조선소는 지난해 말 한화가 인수한 필라델피아에 있는 조선소로, 한화는 이를 통해 미국 조선업 부활과 한국 내 사업 확장을 통한 일자리 창출 등을 실현한다는 계획이다. 이번 투자 금액을 활용해 연간 1~1.5척 수준인 선박 건조 능력을 20척까지 확대하기로 했다. 8월26일에는 한화해운이 필리조선소에 중형 유조선 10척과 LNG 운반선 1척을 발주하는 등 마스가 프로젝트와 관련한 첫 수주 계약을 진행하면서 협력의 물꼬를 텄다.
HD현대·한국산업은행과 서버러스캐피털은 미국과 동맹국의 해양 역량 재건·강화를 목표로 하는 수십억 달러 규모의 공동 투자펀드 조성을 위한 MOU를 체결했다. 삼성중공업과 비거마린그룹은 미국 해군의 지원함 유지·보수·정비(MRO), 조선소 현대화와 선박 공동 건조 등 전략적 파트너십을 구축하기로 했다. 이와 관련해 산업통상자원부는 “세계 최고 수준의 우리 조선사들이 미국 조선업 및 해양 역량 강화와 미국 군함의 유지·보수·정비 사업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한미 양국이 윈-윈(win-win)할 수 있는 조선 분야 협력 모멘텀이 강화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밝혔다.
대미 투자 금액도 기존보다 늘어났다. 현대차그룹은 4년간 미국에 약 36조원을 투자한다. 정의선 현대차 회장이 지난 3월 트럼프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발표한 투자 계획(29조원)보다 7조원 늘어난 규모로, 현지 정책에 대응하고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전략적 결단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추가된 금액은 자동차와 제철, 로봇 등에 투자할 계획이다. 다만 현대차는 증액된 투자 금액이 전부 로봇사업에 투자되는 것은 아니라는 입장을 밝혔다.
대한항공은 70조원 규모의 대미 투자 계약을 체결했다. 미국 보잉사 항공기 103대 구매에 50조원, GE에어로스페이스 엔진 구매에 20조원을 쓴다는 계획이다. 지난 3월 대한항공이 발표한 보잉사 항공기 50대 및 GE에어로스페이스 엔진 구매 건과는 별도의 추가 계약으로, 대한항공 창립 이래 최대 규모 단일 계약이다.
원전·핵심광물 분야 협력도 강화한다. 두산에너빌리티와 한국수력원자력 등은 소형모듈원자로(SMR)와 우라늄 농축 관련 협력 등 4건의 사업에서 미국 기업과 협력한다. 고려아연은 글로벌 방산 기업인 록히드마틴과 게르마늄 공급 구매 및 핵심광물 공급망 협력을 위한 MOU를 맺었다. 핵심 희소금속 분야 한미 협력의 첫 성공 사례다.
류진 한국경제인협회 회장은 한미 비즈니스 라운드테이블에서 “이 같은 투자는 미국의 공급망 안정과 제조업 부흥에 기여하는 동시에, 한국 기업의 글로벌 경쟁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한국계 미국인 여성 3명이 부른 빌보드 차트 1위 주제곡에 ‘업, 업, 업’이란 가사가 나온다”며 《케이팝 데몬 헌터스》 OST 《골든》의 노래 가사인 ‘We’re goin’ up up up, together we’re glowing(우린 점점 더 높이 올라가, 함께 빛나고 있어)’을 소개했다. 그러면서 “오늘 이 자리가 한미가 함께하는 제조업 르네상스, 상승과 영광의 황금시대로 가는 출발이 되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총 5000억 달러 대미 투자…日과 규모 비슷해져
다만 기업들의 대미 투자가 관세 불확실성 해소를 위한 전략적 행보와 궤를 같이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 측의 투자 확대 요구나 정책 리스크에 대한 대응도 필요하다는 경고가 나온다. 정상회담 이후 한국 기업들이 밝힌 1500억 달러의 대미 투자 계획과 한 달 전 관세 협상에서 제시된 3500억 달러 규모의 금융 패키지를 고려하면, 정부가 약속한 총 투자액은 5000억 달러(일부 중복)다. 일본의 투자액(5500억 달러)보다는 적은 금액이지만 국내총생산(GDP) 비중 등을 고려한다면 한국의 투자액 규모가 상당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특히 투자와 별개로 관세 협상 당시에 약속한 금융 패키지 조성과 투자 방안은 이번 정상회담에서도 구체적으로 확정되지 않았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금융 패키지와 관련해 “양국이 구속력 없는 MOU 형태로 운영하기로 합의했다. 법적으로 필요한 부분을 실무적으로 논의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실무 협의 과정에서 이견이 발생할 수 있는 만큼 통상 분야 청구서가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다는 시각도 있다.
삼정KPMG 경제연구원은 ‘한미 정상회담에 따른 국내 산업별 영향’ 보고서를 통해 “한미 간 다방면의 협력 확대가 예상된다”면서도 ‘시장 주도권 확보’와 ‘기술 협력 기회 모색’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특히 이 연구원은 “한국 기업은 첨단기술 협력과 핵심광물 공급망 안정화 논의 속에서 성장동력을 모색해야 한다”며 “특히 대미 투자 실행 과정에 대한 후속 모니터링과 새로운 비즈니스 기회 발굴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비즈니스 라운드테이블에서 제조업 외에 논의된 첨단기술 협력 확대 방안과 관련해서도 “미국의 온라인 플랫폼법, 구글의 지도 반출 등 비관세 장벽 완화 여부에 따라 새로운 기회와 리스크가 동시에 발생할 수 있어 주의해야 한다”고 짚었다.